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단 편집) === 특허청 시절 === [[청년실업|실업자가 된]] 아인슈타인은 대학 동창으로 절친한 친구였던 마르첼 그로스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로스만의 아버지[* 유서깊은 가문 출신이자 방직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가 [[낙하산 인사|특허청 고위공무원에게 부정청탁]]해서 아인슈타인은 간신히 위기를 탈출했다. 1901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면서 스위스의 병역의무가 부과되어 받게 된 징병검사에서 [[평발]]과 [[정맥류]]가 있어 병역면제를 받았는데, 이에 아인슈타인 자신은 놀랐다고 한다. 1902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했다. [[특허청]] 심사관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출원된 특허 서류를 검토하면서 이게 특허 등록이 가능한 건지 아닌지 판정하고 허가를 내리는 일을 한다. 심사관 한 사람이 연간 300여 건[* 1997년 한국 기준. 공휴일 빼고 일 1개의 특허를 처리하는 꼴이다.]의 특허를 처리하는 데다 심사관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의 특허를 처리해야 하므로 심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자투리 시간에 연구를 해서 연구자로서 성과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걸 해내서[* 한 위인전 만화에는 오전에 이미 일을 다 해버려서 상사의 배려로 직장에서도 연구를 한다는 콩트적 대목이 나온다.] 1905년에 5편의 논문을 독일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연속으로 발표했다. 5월에 '[[브라운 운동]]', 3월에 '[[광전효과|광양자 가설]]', 6월에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을 연달아 발표했고 4월에는 분자 크기 결정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7월에는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에 대한 주제로 [[취리히 대학교]][* ETH 취리히는 당시 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없는 기술 교육기관이었다. 오늘날은 ETH 취리히에서 박사를 받을 수 있다.]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교수 [[알프레드 클라이너]]와 함께 발표했다. 9월에는 'E=mc^^2^^'로 잘 알려진 [[질량-에너지 등가원리]]에 대한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다. 12월에는 브라운 운동에 대해 보충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5편의 논문 중 5월에 발표된 세편의 논문은 엄청난 것으로 3가지 논문 모두 이후 '''물리학의 세부 학문을 만들어내면서 이중 광양자 가설으로 [[노벨상]][* 사실 상대론이 직간접적으로 물리학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꿨으며 가장 유명한 업적이라 볼 수 있겠으나, 1921년 수상 당시 상대론은 물리학자 사이에서 아직도 논란이 있었기에 이 부분은 물리학의 이론적인 발전에 대한 기여라고 표현을 바꿨다. '스웨덴 왕립 학술원은, 1895년 11월 27일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규정에 준거하여, 1922년 11월 9일 회합하여, 가능한 검증 이후 상대성과 중력 이론에 부가될 수 있는 가치와 무관하게, 1921년에 물리학의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또는 발명을 이룬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을, 이론 물리학, 특히 광전 효과의 발견에 공헌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광전효과로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을때 수상문.]을 수상하게 되었다.''' [* 때문에 오늘날 과학계는 아인슈타인이 이들 3개 논문을 발표한 1905년을,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1666년과 함께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100주년인 2005년에는 전세계적으로 각종 기념 행사가 열렸었다.] 이 외에도 아보가드로수 관련 논문을 썼다고 한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당시 심사관으로서 시계들의 동기화(synchronisation)를 하는 기계에 대한 특허를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은 현대화가 가속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여러 시계들(이를테면 전국의 기차역들에 있는 시계들)을 동기화하는 것은 사업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또, 19세기 말은 제국주의의 시대였고 본국과 점령지들 사이의 시계를 동기화 시키는 것(시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에 시계들을 동기화하는 것에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당연히 그 중에는 전자기현상(빛)을 이용해 시계를 동기화하겠다는 아이디어도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이런 아이디어들을 자연스럽게 접하였다. 때문에 아인슈타인에게 절대 시간, 여러 관찰자들 사이의 변환 등의 개념은 단순히 추상적 사고 대상이 아니라, 여러 특허들을 보며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특허 서류들을 보면서 [[전자기학]]에 대한 사고 실험을 많이 했고, 시간이 남을 때마다 [[도서관]]에 갔으며 그것이 굉장히 즐거웠다고 한다. 오늘날 GPS 등에서 시계를 동기화 하는데 상대성 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서 일했던 경험의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09년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 사표를 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